박지원은 부인의 묘지에서 그동안 가난함을 웃음으로 달래던 그넉넉함을 잃고 만다. 가난이 얼마나 심했으면 연암은 일주일을 굶고 있다 찾아온 후배 이서구를 반갑게 맞이하여 밤새도록 자신의 생각을 그와 교유하기도 한다. 배고픈 것은 둘째이며 지적 유희와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이 더 조급했던
들어있다는 말이다. 작가가 처한 현실을 그대로 쓸 때 참다운 문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문이사의(文以寫意)
이는 문학은 생각, 다시 말해 대상 그 자체에서 얻어진 인식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내야지, 다른 무엇(작품, 관념)이 개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3) 법고창신론 (法古創新論)
創新이 계승되어야 하며, 이렇게 될 때 후대 聖人에 의해 계승 발전된 것을 前代 聖人이 다시 살아나와서도 異議를 가하지 않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것에의 악착스런 墨守도 주제넘은 無視도 君子는 따르지 않는다 하면서 朴齊家에게 古文에 抱泥되지 않는 것을 칭찬하면서도 立論이 지나
사상, 문학, 청문화에대해 알아보겠다.
2. 박지원의 생애
1. 연암의 초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필균(弼均)이며,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다. 그의 가문은 노론(老論)의 명문세신(名門世臣)이었지만, 그가 자랄 때는 재산이 변변치 못해 100냥
쌍거풀이 지셨으며 귀는 크고 희셨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이어졌고 기름한 얼굴에 수염이 듬성듬성하셨으며 이마 위에는 주름이 있는데 마치 달을 치어다 볼 때 그러한 것 같았다. 키가 커 훤칠하셨으며 어깨와 등은 곧추섰고 정신과 풍채는 활달하셨다. 박종채,『과정록』, 한국한문학연구, 제6집.
論연암은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같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한다. ‘기’를 부여받고 태어나서 삶의 의지를 지닌 채 산다는 점에서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인간과 자연, 인간사와 자연사를 연속적인 관계를 짓고 있는 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이 글은 그의 철학적인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 경학(經學)·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특히 문재(文才)를 타고나 이미 18세 무렵에〈광문자전 廣文者傳〉을 지었다. 1757년〈민옹전 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
성리학을 교조적(敎條的)으로 만들어 주자의 비판자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탄압하는 등 성리학적 사상에 입각한 사상 통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민족의 생활을 지리멸렬로 만든 것은 위에서 언급한 사회경제적 토대뿐만이 아니었다. 물적 토대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짓기 때
‘도(道)가 없는 신식 문체(文體)를 도(道)가 있는 옛 문체로 바꾸자’
연암체 = 소품체 + 연암의 개성
청에서 들어온 것으로 주로 희곡, 소설 등의 서민적 문예에서 나타난 자유분방하고 감각적인 내용의 단문 문체
실학사상을 통한 새로운 인식틀의 창조.
양반 사회에 대한 회의
지구
사상’의 적용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매우 크다.
물론 유학은 본래 민본사상(民本思想)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근대적 ‘민주(民主)’의 이념을 찾기는 어려웠다. 이에 정약용은 민(民)의 개념을 이전과 달리 해석하였고, 이 새로운 사상을 「탕론(蕩論)」과 「원목(原牧)」 등을